나의 이삿짐 속에 계수님께
15년 동안 계속 대전에 남아서 사람들을 보내기만 하다가 막상 나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떠나올 때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전교도소는 나의 30대의 10년간과 40대의 전반(前半) 5년간을 보낸 곳이었습니다. 대전의 15년 동안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호송차 뒤에 실어놓은 나의 징역보따리 외에 내가 가지고 가는 가장 가슴 뿌듯한 '성장'은 무엇인가. 숱한 기억 속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사람들'에 대한 추억입니다. 탈의실까지 따라와 이송 보따리 져다주며 작별을 서운해 하던 친구들, 그리고 그들로서 대표되고 그들과 꼭 닮은 사람들, 사람들……. 그것은 15년의 황량한 세월을 가득히 채우고도 넘칠 정도의 부피와 뜨거움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징역살이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또 징역살이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가 얻을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변혁' 그 실체이었습니다. 대전 ― 전주간의 1시간 20분은 이러한 변혁을 자각하고, 완성하고, 그리고 그것을 내 속에 확보하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수많은 친구들의 삶과 고뇌를 내 속 깊숙히 육화시켜 이제는 그것을 나 자신의 일부로서 편애되도록 노력해갈 생각입니다. 그것은 낯설고 어려운 처소에서마다 나를 강하게 지탱해주는 긍지가 되고, 이윽고 나를 드넓은 대해(大海)로 인도해주는 거대한 물길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전주교도소에는 기상 나팔 대신 종을 울립니다. 국민학교 시절의 종소리보다 약간 낮고 쉰 듯한 음색입니다. 나팔소리보다 한결 편안한 것입니다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다름이 없습니다.
전북 일원에는 명산과 고찰 등 명소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내장산, 지리산, 덕유산, 대둔산, 마이산, 광한루……. 그러나 자연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인공(人工) 중의 인공인 법의 한복판에 유폐되어 있는 우리들에게 가까운 곳에 명승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별다른 친근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반가운 것은, 거실 창 앞에 서면 동북쪽으로 녹두장군의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략할 때 넘었던 '완산칠봉'(完山七峰)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지축을 울리던 농민군의 발짝소리가 지금은 땅 속에서 숯이 되어 익고 있을 완산칠봉 일곱 봉우리를 그도 옥창(獄窓)을 격(隔)하여 마주하는 감회는 실로 비범(非凡)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낮은 종소리로 잠 깨며, 완산칠봉 일곱 봉우리를 돌이켜보며, 새로운 사람들의 삶을 만나며 시작하는 전주 징역은, 아직은 기약 없지만 백제 땅의 그 어기찬 역사만큼 내게도 큼직한 각성을 안겨주리라 기대됩니다.
뒤늦은 시집살이(?) 건투를 빕니다.
1986. 3. 24.